조선 최고의 요리점, 명월관의 탄생
1909년, 조선 최고의 궁중 요리사 안순한이 지금의 종로구 동아일보 자리에 명월관이라는 이름으로 요리점을 열었습니다. 이는 20세기 최초의 조선 요리집으로, 일반인들에게 궁중 음식을 맛볼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명월관은 곧 조선의 유명한 요리점으로 자리 잡으며,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호화로운 명월관의 내부
명월관은 회색빛의 2층 양옥 건물로, 외관부터 고급스러움을 자랑했습니다.
온돌로 된 1층은 일반 손님을 받았고, 양탄자와 돗자리로 장식된 2층은 귀빈을 맞이했습니다.
특히 매실이라는 특실은 최고의 귀빈들만을 위한 공간으로 유명했습니다.
명월관은 임금님만 맛보던 궁중 음식을 일반인들에게 선보이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명월관의 성장
1910년, 한일 강제 합병 조약이 체결되며 일제는 궁중악을 없애고자 광무제를 폐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궁중 기녀들은 궁을 떠나 연주회를 열거나 명월관 같은 요정에 들어가 연주를 이어갔습니다.
이로 인해 명월관은 음식, 술, 공연까지 모두 갖춘 최고의 요리점으로 성장했습니다.
명월관의 최고 기생, 명월
명월관의 인기를 이끈 주인공은 바로 당대 최고의 기생 명월이었습니다.
고운 얼굴과 자태로 남성들의 심금을 울렸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수천 냥을 뿌리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명월은 탁월한 잠자리 기술로 유명했으며, 하룻밤을 보낸 남성들은 다리가 풀려 기어 나오는 일이 잦았고, 간혹 복상사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복상사의 진실과 명월의 비극
복상사란 잠자리 도중 남자가 갑자기 여자 배 위에서 죽는 일로, 심장마비 같은 병으로 인한 돌연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일본 고위 인사들 중 명월과 하룻밤을 보낸 뒤 연달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순사들은 명월을 체포해 고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명월이 독립운동에 가담해 일본 간부들을 죽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명월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고, 결국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하고 맙니다.
명월의 잔혹한 유산
명월이 사망한 후 100년이 흐르고, 2000년대 후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관된 명월의 생식기 표본에 대한 괴담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본은 일제 강점기 당시 명월의 시신을 해부해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한 것이었으며, 이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습니다. 이에 시민단체는 인도적 차원에서 해당 표본을 적절히 처리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2010년 6월 14일 폐기되었습니다.
명월의 진정한 정체는?
명월의 생식기 표본이 보관된 채로 발견된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명월관의 기생 명월인지, 아니면 다른 여인인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후세에서라도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천도재가 지내졌으며, 그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오랫동안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