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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운명: 경찰관의 피를 부른 희대의 살인마 이학만!"

by Freesia CRIME Story 2024.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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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평구 모텔에서 시작된 잔혹한 살인극

 

 

 

2004년 8월 1일, 서울 은평구 응암동의 한 모텔. 그날 오후, 한 통의 긴급 신고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건 이는 35살의 여성, 이씨였다.

그녀는 자신의 남자친구 이학만에게 무차별적인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외치며 도움을 요청했다.

신고를 접수한 서부경찰서 강력반은 긴급히 모텔로 출동했다.

하지만 경찰이 도착했을 때, 이학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현장에 남아있던 이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경찰은 이학만을 검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이란, 바로 여자친구 이씨가 이학만을 특정 장소로 유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 남산에서 시작된 한 남자의 추락

이학만, 그는 1969년생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님의 불화는 그를 방황의 길로 내몰았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사고를 일으키는 문제아로 성장했다.

결국 절도와 강간으로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만난 이들과 어울리며 재범을 거듭했다.

그렇게 전과 10범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 이학만. 가족과 연을 끊고 감옥에서 나와 택시기사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도 여전히 폭력적인 성향은 남아 있었다.

📅 운명의 약속: 카페에서 벌어진 피의 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서, 이학만을 불러낸 장소는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의 한 카페였다.

시간은 밤 9시. 당시 사건을 담당한 서부경찰서에서는 이학만을 검거하기 위해 3명의 경찰관을 파견했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두 명의 경찰관은 이씨와 함께 이학만을 기다렸다.

카페 밖에서는 정승화 경장이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대기하고 있었다.

 

밤 9시 25분, 이학만은 약속 시간보다 한참 늦게 카페에 들어섰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이학만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남성을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심재호 경사는 재빨리 신분증을 꺼내 보이며 "경찰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이학만을 체포하려고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기 시작했다.

⚔️ 피를 부른 사시미 칼: 경찰 살해의 순간

 

 

 

그러나 그 순간, 이학만은 안주머니에서 사시미 칼을 꺼내들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심재호 경사의 가슴을 향해 칼이 날아들었고, 그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심 경사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이학만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쓰러진 심경사의 옆구리를 몇 차례 더 찌르며 잔인함을 더했다.

이학만의 칼질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옆에 있던 이재현 순경조차도 이를 막을 겨를이 없었다.

 

이재현 순경은 쓰러지는 심경사를 본능적으로 부축하려 몸을 낮췄다.

하지만 이학만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순경의 등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이순경은 등에서 느껴지는 칼의 고통을 참으며 저항했고, 결국 이학만의 다리를 붙잡아 넘어뜨렸다.

카페 안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무서운 상황에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 탈주극과 그 이후의 추적: 끝나지 않는 공포

 

 

이학만은 젊은 두 경찰관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현장을 탈출했다.

경찰은 충격에 휩싸였고, 이학만을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8월 2일, 영등포구 신길동에서 이학만의 택시가 발견되었고, 경찰은 공개수배를 내렸다.

그러나 이학만은 그 누구도 쉽게 잡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경찰은 한 달 넘게 그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그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한편, 경찰은 이학만의 인터넷 사용 기록을 추적하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의 한 아파트에서 그의 주민등록번호로 만들어진 인터넷 계정을 발견했다.

경찰은 무장 인원 300명을 투입해 아파트를 포위했지만, 이학만이 아닌 12살 초등학생이 수배 전단지에서 본 이학만의 주민등록번호로 인터넷 아이디를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헛수고에 그친 수색작전이었다.

🏠 박씨의 기지, 이학만의 마지막 순간

8월 8일, 경기도 광명에 사는 한 남성이 서울에 사는 어머니가 위험하다는 다급한 신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바로 이학만이 경찰의 눈을 피해 강서구 방화동의 한 다세대 주택에 침입한 것이죠.

이학만은 집안에서 49세의 박씨와 그녀의 4살 손자 김군을 겁을 주기 위해 자신이 경찰 살해범이라고 밝히며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박씨는 기지를 발휘해 이학만을 진정시키고, 국수를 끓여주는 등 그를 안심시켰습니다.

이학만은 차려준 밥을 먹고 잠시 컴퓨터를 사용하겠다고 했지만, 그 사이 박씨는 청소기를 작동시켜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습니다.

 

경찰은 즉각 출동해 이항만이 있는 집으로 진입했고, 그가 자해를 시도하는 순간 칼을 빼앗아 그를 체포했습니다.

이학만은 병원으로 이송되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고, 이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그리고 교훈

 

 

 

이학만은 2004년 12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항소심에서 우발적 범행이라는 주장과 반성의 기미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복역 중이며,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경찰의 처우가 개선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찰들은 최소한의 무기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항만에게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테이저건과 경량 보호복이 지급되며 경찰들의 안전이 조금이나마 보장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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