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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 일가족 살인사건의 잊혀진 진실, 두이분과 오휘웅 사건의 진상

by Freesia CRIME Story 2024. 10.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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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인천 연쇄살인 사건, 우연과 계획의 교차점 🕵️‍♀️

1974년 12월 30일 밤 10시 40분, 인천시 중구 선화동의 작은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가게 문을 닫고 마무리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느지막하게 한 손님이 찾아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너편에서 쌀집을 운영하던 27세의 여성, 두이분 씨입니다.

그녀는 불안한 목소리로 주인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아주머니, 죄송한데, 우리 가게에 좀 같이 가 주실 수 있으세요?" 두 씨는 외출 후 돌아왔더니 문이 열려 있었다고 합니다. 불안감에 쫓기던 두 씨와 주인 아주머니는 조심스럽게 쌀가게로 향했습니다.

 

가게에 도착하니 정말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두 씨의 가족은 가게 안에 붙어 있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고 있었고, 두 씨는 남편과 아이들이 방 안에서 자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고,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남편 정 씨(38세)와 두 아이(아홉 살, 여섯 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던 것입니다.

두 씨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서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 충격적인 발견, 죽음의 원인 🔍

그 후, 두 씨가 현장에 도착해 시신을 보자마자 연탄가스 중독이 아닌가 의심했습니다.

당시 연탄을 사용하는 집이 많아 탄소 중독 사건이 빈번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곧이어 정 씨의 목에 감겨 있는 머플러와 넥타이를 발견하면서 의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경찰에 신고했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처음에는 단순 자살로 판단했습니다.

정 씨가 최근 지인에게 20만 원을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해 우울해 있었다는 아내의 진술도 있었고, 그가 다리를 다쳐 괴로워했다고 하니 자살로 보일 법했습니다.

 

하지만 부검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정 씨와 아이들의 사인이 노끈이나 도구에 의한 교살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세 명 모두 목이 졸려 사망했으며, 정 씨의 얼굴에는 손톱으로 긁힌 듯한 상처도 남아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저항하면서 생긴 상처일까?

그러나 아이들의 손톱은 그 정도로 길지 않았습니다.

😱 범죄의 정체, 의심의 중심 😱

부검 결과, 정 씨의 목에는 교살 자국 외에도 여러 번 칼로 그은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경찰은 타살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조사 결과, 두 씨가 내연남인 오희웅과 함께 사건을 모의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두 사람의 관계는 더 깊어졌습니다.

오희웅은 29세의 미혼 남성으로, 종교 모임의 리더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수사팀은 정 씨의 내연남인 오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두 씨의 자백을 받았는데, 그녀는 남편 정 씨가 의처증이 심해 폭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끊고 오 씨와 함께 살고 싶어했으며, 결국 가족을 없애기로 결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 사건의 진실, 두 사람의 얽힌 운명 🔗

사건 당일, 두 씨는 신경안정제를 대량 구입해 남편에게 주며 만취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이들에게도 같은 음료수를 건넸고, 모두 깊은 잠에 빠진 후 오 씨가 방문하게 했습니다.

오 씨는 미리 준비한 도구로 남편 정 씨의 목을 졸랐고, 아이들 역시 교살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두 사람이 함께 모의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사건이 해결되는 듯 보였으나, 오 씨는 이후 모든 진술을 뒤집고, 자신은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경찰의 강압 수사와 고문을 주장하며, 사건 발생 당시 자신은 집에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현장에서 그의 지문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불행한 운명: 두이분과 오휘웅 사건의 진실

 

 

 

 

1975년 3월, 인천지방법원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오휘웅 씨는 강압적인 수사 방식으로 자백하게 되었다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당시 그는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며 극심한 고통을 표현했고,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오휘웅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 판결은 여러 가지 의문을 남겼습니다.

🌀 두이분의 극단적인 선택

사건의 진실이 가려지지 않은 가운데, 두이분 씨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두 씨는 사건의 중심에서 오휘웅 씨와 깊은 연관이 있었고, 자신의 역할과 그로 인해 발생한 비극적 결과에 대한 자책감이 컸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나는 모든 것을 망쳤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이는 그녀가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음을 암시합니다. 두 씨의 죽음은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오휘웅 씨에게 더욱 불리한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 진실의 미궁 속으로

결국,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되었고, 두이분 씨의 자살과 오휘웅 씨의 사형 선고는 범죄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1976년 대법원은 오휘웅 씨의 상고를 기각하며 그의 사형을 확정했습니다.

1977년, 오휘웅 씨는 결국 사형이 집행되었습니다. 

사형 집행 직전,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며 "나는 절대로 죽이지 않았다"라고 외쳤습니다.

🕊️ 사라진 진실, 남겨진 의문 🕊️

 

 

 

 

사건 이후 10년이 지나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기자 조갑제는 이 사건을 책으로 출간했습니다.

그는 오 씨의 무죄를 확신하며 잘못된 수사와 판결로 인해 희생된 피해자를 조명했습니다.

하지만 오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나 재심의 기회조차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범죄와 인생의 우연, 그리고 고통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로 남았습니다.

오 씨가 정말 무고한 사람이었다면, 그의 억울함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요?

지금도 누군가는 이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와 두 씨가 저지른 범죄는 진정한 사랑을 위한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한 인간의 비극적인 결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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