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9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운명을 뒤바꾼 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대한민국은 충격적인 사건을 맞이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며 18년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린 것입니다.
그의 사망으로 대한민국 권력의 최상층부는 공백 상태에 빠졌고, 이는 곧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야망은 곧바로 12.12 군사반란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서막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치열했던 9시간 동안의 사건을 집중적으로 파헤쳐 보겠습니다.
🚨 암살 이후 권력 공백의 시작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으로 대한민국은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뿐만 아니라 그의 최측근이자 경호를 책임지던 차지철 경호실장까지 사망하면서, 권력 공백은 심화되었습니다.
임시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 국무총리 아래에서 계엄이 선포되었고, 수사 본부인 **합동수사본부(합수부)**가 꾸려졌습니다.
그 중심에 있던 이는 보안사령관 전두환.
그는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군대를 장악할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 하나회의 암약과 정승화의 경고
하나회는 전두환을 포함한 육군사관학교 11기와 12기를 중심으로 조직된 군내 사조직으로, 군대 각층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권력의 기회를 노렸습니다.
하지만 당시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는 하나회의 존재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자리에서 경질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네트워크는 그의 계획을 미리 파악했고, 전두환은 이를 선제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해 정승화 체포 작전을 계획했습니다.
🎯 ‘생일잔치’라는 이름의 반란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하나회 소속 장교들과 함께 정승화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작전명은 ‘생일잔치’. 이날 저녁 7시 10분, 합수부의 헌병 65명이 정승화가 머물고 있던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들이닥쳤습니다.
전두환 측은 “대통령의 체포 허가를 받았다”는 거짓말로 정승화를 체포하려 했지만, 정승화는 이를 거부하며 국방부와 통화하려 했습니다.
이에 전두환 측은 총격전 끝에 정승화를 강제로 연행했습니다.
⚔️ 군 내부의 분열과 진압군의 움직임
정승화 체포 소식은 곧바로 육군 지휘부에 전달되었고, 수경사령관 장태완과 특전사령관 정병주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장태완은 수경사 병력과 전차를 동원하겠다고 선언하며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육군 지휘부는 특전사 9공수 여단을 투입하여 합수부를 진압하려 했지만, 전두환은 보안사령부를 통해 군 내부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명령을 방해했습니다.
결국 육군 지휘부의 진압 작전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 최후의 선택: 군부 완전 장악
전두환은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특전사 병력을 동원해 육군 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하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특히 육군 지휘부의 핵심 인물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3공수 여단을 출동시켜 특전사령관 정병주를 체포하려 했습니다.
🧩 결국, 반란의 성공
전두환의 치밀한 계획과 하나회의 조직적인 움직임은 결국 군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이후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한민국의 제5공화국 시대를 열었고, 이는 또 다른 군사 독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법적 판결
1. 사건 심리
1995년, 김영삼 정부는 민주화를 목표로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1212사태 및 이후의 불법적인 권력 장악 과정을 재조사하고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이 재판은 군사반란과 관련한 책임자들을 처벌하려는 민주주의 회복의 상징적 사건으로 평가됩니다.
2. 주요 피고인과 혐의
- 전두환: 1212군사반란의 핵심 설계자로, 쿠데타를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이후 대통령직에 올랐습니다.
- 노태우: 전두환의 주요 측근으로,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 기타 관련자들: 쿠데타에 가담하거나 이를 방조한 군 간부들도 피고로 지목되었습니다.
3. 주요 혐의
- 군사반란 및 내란: 헌법 질서를 무너뜨리고 군사적 쿠데타를 일으킨 혐의.
- 불법적 권력 장악: 군사반란 이후 헌법적 절차 없이 권력을 장악한 행위.
4. 판결 결과
1996년, 서울고등법원은 아래와 같은 판결을 내렸습니다.
- 전두환: 사형 선고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 노태우: 징역 22년 6개월 (이후 17년으로 감형)
이외에도 다른 관련자들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추징금을 부과받았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이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지만, 이 판결은 한국 사회에서 법치와 정의의 상징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 오늘의 초점: 권력의 공백과 야망의 대가
이번 이야기에서는 권력 공백을 노린 조직적인 움직임과 그 치밀한 계획이 어떻게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다뤘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명백한 불법 행위였지만, 당시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군 내부의 분열로 인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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